<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예수님> 요한복음 5:1-18
오늘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야기죠.
저는 말씀을 묵상하며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말씀 구절로 요5:17을 꼽아봤습니다.
요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데 나는 어떤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란 질문을 말이죠. 예수께서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서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낮과 밤이 없으며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일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근거로 자신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일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나는 어떠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란 질문을 품고 말씀을 묵상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엔 두 가지 믿음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베데스다 연못에서 수년 혹은 수십년 동안 머물며 병이 낫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의 믿음입니다.
요5:3-4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떠한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잔잔한 연못만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을 때 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나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방식은 성경적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많은 무리 중 한 사람만을 특정하게 치유하시는 방식과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 또한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셨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연못에 1등으로 뛰어 들어가야만 병고침을 받는 형식의 1등 우선주의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찌됐든 그 병자들에게 이러한 전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베데스다 연못의 수면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면 병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막연한 기대이고 소망입니다. 언제 물이 움직일지 알 수도 없고, 확실히 내가 가장 빠르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자신에게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 병에서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이죠. '언젠가는 나에게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믿음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헛된 믿음을 갖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내가 오늘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면 나의 미래가 보장되겠지', '내 실력을 키우고 내 브랜드 가치를 끌어 올리면 성공할 수 있을거야',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면 내 삶이 풍요롭고 평탄할거야'라는 형식의 막연한 믿음 말입니다.
제가 이 믿음을 헛된 믿음, 막연한 믿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형태의 믿음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믿음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향해 성경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20-21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의 영혼을 도로 찾으실지 모르는데 이 땅의 물질과 부요와 풍요를 위하여 모든 삶의 시간을 헌신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미래에 대한 풍요로운 약속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이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으니 오늘, 바로 지금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요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38년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고 물으셨습니다. 자신이 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말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남의 탓을 하든 자기의 탓을 하든 그의 생각이나 의견은 전혀 중요하지 않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향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하면 내가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다음에 만나면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바로 지금 '일어나 걸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나았다!'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말입니다. "내가 지금 너와 함께 하고 있으니 너는 지금 당장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걸어라"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깨닫고, 바로 지금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믿음의 모습이자,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참된 모습입니다. 믿음은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 삶에서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바로 오늘 내가 삶 속에서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에 예수님은 많은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공격을 받게 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쳤기 때문이고, 병자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걷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로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게 됩니다.(16절)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까? 38년된 병자는 그 때까지도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었고, 앞으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 다음 날도 분명히 그는 거기에 누워있었겠죠. 그러면 내일 고쳐도 되지 않습니까? 굳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않으시고, 다음 날 그를 찾아가서 고쳐주셨으면 박해 받을 이유도 없고, 불필요한 갈등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내일 내가 너를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날이 안식일이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 38년된 병자를 만나고 고치셨던 그 날은, 그저 '오늘'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께 허락하신 오늘,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오늘, 그렇기에 나도 쉬지 않고 일할 수밖에 없는 오늘 말입니다.
처음 드렸던 질문으로 묵상을 마무리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하나님의 일을 지금 행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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